뉴욕시장이 전 세계 석학을 초빙해 자신들이 당면한 환경오염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국제도시계획회의’에 참석한 석학들이 머리가 터지도록 논의를 거듭했지만, 결론은 ‘답이 없다’와 ‘이 문제가 뉴욕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절망이었다.
1898년,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말똥’이었다. 교통수단이 말과 마차였던 뉴욕에는 하루에 그걸 20㎏씩 배출하는 녀석이 20만 마리나 있었다. 하루 총계 4000t. 4L 분량의 고약한 액체는 보너스였다. 더 큰 문제는 돌아다니며 길바닥에 싼다는 엄청난 사실이었다. 청소를 해도 길의 가장자리마다 m 단위로 쌓여 있는 그것은 계속 썩어갔고 비가 내리면 장관이 펼쳐졌다. 이러다 말똥에 파묻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의 순간, 신께서 자동차라는 해결책을 내려주셨다.
그런데 그 해결책에는 사고라는 태생적 문제점이 붙어 있었다. 차는 말보다 훨씬 빠르게 질주하는데 중앙선도 교통표지판도 없고 교통법규는 아직 상상 밖에 있었다. 운전학원과 면허? 당연히 없었다. 안전벨트도 시간이 엄청 흐른 뒤에야 등장했다. 우리는 그런 걸 하나씩 해결하며 여기까지 왔다. 우리가 말똥에 묻힌 채 살 수야 없으니까.
1814년, 조지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내놨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나온 지 38년 만의 일이다. 30t의 석탄을 싣고 시속 6㎞로 달렸다. 힘은 괴물급이지만 속도는 겨우 걸어가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쓸 만했다. 하지만 그 녀석이 다닐 철로가 없었다. 증기기관으로 퍼낸 석탄으로 용광로를 돌려 철을 생산했고, 증기기관차로 그걸 운반해 철로를 확장해 나갔다. 그렇게 11년의 세월이 흐른 1825년, 로코모션이라는 증기기관차가 450명을 태우고 시속 24㎞로 달렸다. 그리고 없던 문제가 생겨났다. 1830년 허키슨 경의 사망을 시작으로 교통사고가 증가했다. 엄청난 덩치를 통제할 수 있는 브레이크 기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 제동장치, 쇠사슬 식 제동장치 등 별짓을 해봤지만 역부족, 결국 44년이 흐른 1869년 웨스팅하우스가 압축 공기로 모든 바퀴에 동시에 제동이 걸리는 기술을 내놓기 전까지 사고는 계속됐다. 하지만 철도건널목도 없고, 신호 장치도 없고, 전신이 없어서 역 간에 통신도 이뤄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시간마저 통일되지 않았다. 1851년이 돼서야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한 표준시가 도입됐다. 그것도 영국에 한해서. 이번에도 우리는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고 우리는 지금 고속전철을 누리고 있다.
1898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한양에 전차가 개통됐다. 1주일 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전차에 치여 죽었다.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눈이 뒤집혔고 군중을 선동해 전차를 도끼로 찍어 부수고 불태웠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막차가 지나갔다고 착각한 2명이 시원한 철로를 목침 삼아 베고 자다가 돌아가셨다. 신호등, 횡단보도는 물론이고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정차장조차 없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정원 초과의 전차가 멈추기도 전에 사람들은 올라타고 뛰어내렸다. 게다가 극심한 가뭄이 전차의 불기운에 밀려 물을 관장하는 용이 힘을 못 쓰기 때문이라고 소문이 돌아 민심이 흉흉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씩 문제를 해결했고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지하철을 누리고 있다.
1991년, 전설의 소니가 재충전이 가능한 리튬이온전지를 내놨다. 그리고 21년이 흐른 2012년 테슬라가 모델S를 내놓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첫 단추가 끼워진 거다. 그런데 자꾸만 불이 나네? 그래서 대책 없는 화재 때문에 전기차는 안 된다고? 혁신의 와중에 반드시 등장하게 마련인 ‘전에 없던 문제’가 두려워서 멈췄다면 천연 성분의 말똥 향기를 받아들이고, 온실가스로 올여름 같은 후끈한 날씨에 적응하며 사는 수밖에.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인간의 혁신 지능은 대두하는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것이고 그 ‘해결’마다 돈을 벌 기회가 존재할 것이다. 그간에 기차 자동차 전차의 ‘해결’은 그들이 했지만, 이번 ‘해결’만은 이미 기술 강국이 된 우리가 해내고 누렸으면 좋겠다.
뉴욕시장이 전 세계 석학을 초빙해 자신들이 당면한 환경오염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국제도시계획회의’에 참석한 석학들이 머리가 터지도록 논의를 거듭했지만, 결론은 ‘답이 없다’와 ‘이 문제가 뉴욕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절망이었다.
1898년,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말똥’이었다. 교통수단이 말과 마차였던 뉴욕에는 하루에 그걸 20㎏씩 배출하는 녀석이 20만 마리나 있었다. 하루 총계 4000t. 4L 분량의 고약한 액체는 보너스였다. 더 큰 문제는 돌아다니며 길바닥에 싼다는 엄청난 사실이었다. 청소를 해도 길의 가장자리마다 m 단위로 쌓여 있는 그것은 계속 썩어갔고 비가 내리면 장관이 펼쳐졌다. 이러다 말똥에 파묻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의 순간, 신께서 자동차라는 해결책을 내려주셨다.
그런데 그 해결책에는 사고라는 태생적 문제점이 붙어 있었다. 차는 말보다 훨씬 빠르게 질주하는데 중앙선도 교통표지판도 없고 교통법규는 아직 상상 밖에 있었다. 운전학원과 면허? 당연히 없었다. 안전벨트도 시간이 엄청 흐른 뒤에야 등장했다. 우리는 그런 걸 하나씩 해결하며 여기까지 왔다. 우리가 말똥에 묻힌 채 살 수야 없으니까.
1814년, 조지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내놨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나온 지 38년 만의 일이다. 30t의 석탄을 싣고 시속 6㎞로 달렸다. 힘은 괴물급이지만 속도는 겨우 걸어가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쓸 만했다. 하지만 그 녀석이 다닐 철로가 없었다. 증기기관으로 퍼낸 석탄으로 용광로를 돌려 철을 생산했고, 증기기관차로 그걸 운반해 철로를 확장해 나갔다. 그렇게 11년의 세월이 흐른 1825년, 로코모션이라는 증기기관차가 450명을 태우고 시속 24㎞로 달렸다. 그리고 없던 문제가 생겨났다. 1830년 허키슨 경의 사망을 시작으로 교통사고가 증가했다. 엄청난 덩치를 통제할 수 있는 브레이크 기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 제동장치, 쇠사슬 식 제동장치 등 별짓을 해봤지만 역부족, 결국 44년이 흐른 1869년 웨스팅하우스가 압축 공기로 모든 바퀴에 동시에 제동이 걸리는 기술을 내놓기 전까지 사고는 계속됐다. 하지만 철도건널목도 없고, 신호 장치도 없고, 전신이 없어서 역 간에 통신도 이뤄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시간마저 통일되지 않았다. 1851년이 돼서야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한 표준시가 도입됐다. 그것도 영국에 한해서. 이번에도 우리는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고 우리는 지금 고속전철을 누리고 있다.
1898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한양에 전차가 개통됐다. 1주일 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전차에 치여 죽었다.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눈이 뒤집혔고 군중을 선동해 전차를 도끼로 찍어 부수고 불태웠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막차가 지나갔다고 착각한 2명이 시원한 철로를 목침 삼아 베고 자다가 돌아가셨다. 신호등, 횡단보도는 물론이고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정차장조차 없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정원 초과의 전차가 멈추기도 전에 사람들은 올라타고 뛰어내렸다. 게다가 극심한 가뭄이 전차의 불기운에 밀려 물을 관장하는 용이 힘을 못 쓰기 때문이라고 소문이 돌아 민심이 흉흉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씩 문제를 해결했고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지하철을 누리고 있다.
1991년, 전설의 소니가 재충전이 가능한 리튬이온전지를 내놨다. 그리고 21년이 흐른 2012년 테슬라가 모델S를 내놓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첫 단추가 끼워진 거다. 그런데 자꾸만 불이 나네? 그래서 대책 없는 화재 때문에 전기차는 안 된다고? 혁신의 와중에 반드시 등장하게 마련인 ‘전에 없던 문제’가 두려워서 멈췄다면 천연 성분의 말똥 향기를 받아들이고, 온실가스로 올여름 같은 후끈한 날씨에 적응하며 사는 수밖에.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인간의 혁신 지능은 대두하는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것이고 그 ‘해결’마다 돈을 벌 기회가 존재할 것이다. 그간에 기차 자동차 전차의 ‘해결’은 그들이 했지만, 이번 ‘해결’만은 이미 기술 강국이 된 우리가 해내고 누렸으면 좋겠다.
한경닷컴 2024.10.22